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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호 > 국내외미술동향 > 국보 이야기 > 김호년 - 국보가 된 "달항아리"와 현대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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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寶 이야기


국보가 된 「달항아리」와 현대회화

김호년 /미술평론가, 고미술저널 발행인

요즘 우리 전통 유물 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것이 ‘달항아리’다. 원래의 이름은 ‘조선백자대호’다. 이 항아리들이 달항아리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된 것은 화가들이 항아리인 듯 달인 듯 작품 속에 우리 고유정서의 시적인 이미지를 가미하면서부터다. 우리 전통유물들은 시대에 따라 많이도 변했다.
인사동에서 고도자만을 취급하면서 40여년을 종사해온 한 원로는 일정한 시기를 주기로 한때는 고려청자가 잘 팔리다가는 백자가 그 뒤를 잇는가하면 그 백자의 열정이 시들하면 분청사기가 인기를 모으기 시작한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 때마다 같은 고려청자라도 그 기종이 조금씩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고도 했다. 백자의 경우, 한때는 선비들이 쓰던 문방구류들이 인기가 있었는가 하면 엉뚱하게도 여인들이 쓰던 부엌용품에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더러는 서민들이 쓰던 민예품이 의외로 인기를 타기도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 속에서 제일 큰 발전을 한 것이 문제의 ‘달항아리’다. 달항아리의 숨겨진 미적요소를 화가들이 찾아낸 것이다. 서양의 한 조각가가 늘 산책하던 오솔길에 무심히 놓인 바윗돌을 보고는 어느 날 갑자기 저 돌을 조각실로 옮겨달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돌 속에 갇힌 여인을 구출해야 한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조각가는 그 돌로 아름다운 여인상을 조각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예술가들은 일반인들이 무심히 지나는 일상 속에서도 돌 속에 갇힌 여인을 구해내듯이 우리 전통의 유물 속에서도 세계에 자랑할 미학을 찾아내고 그 스스로도 작품화해 오늘의 그를 빛내고 있다. 한때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이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화가들이라면 우리의 전통 유물 중에는 돌 속에 갇힌 여인을 구출하듯 많은 유물들이 화가의 작품 속에서 세계를 향하는 날개로 돋아나 세계를 향해 날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05년 8월이다.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국립고궁박물관의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백자 달항아리>전을 8월 15일부터 9월 25일까지 개최했다.



김환기 <항아리와 여인>


도상봉 <정물>

이 전시에는 모두 9점이 출품되어 화제를 모았다. 여기에는 이미 국보 제262호로 지정된 우학문화재단 소장품을 비롯 보물 제1424호로 지정된 삼성미술관 리움소장의 얼룩진 항아리 등 높이가 40cm 이상의 작품을 전시 뒤 심사해서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조건으로 출품토록 했다. 여기에 초대된 것은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항아리와 영국대영박물관 소장의 것 두 점이 특별전시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과 디아모레뮤지움소장품과 개인소장품 등이다. 이 전시 이후 달항아리들은 보물을 국보로 승격시킨 삼성리움 소장품을 비롯 국박소장과 디 아모레뮤지움 소장품 등 4점을 보물로 지정하고, 개인소장 1점과 외국소장품 2점은 그대로 제외되었다. 여하튼 최근 달항아리의 조형성의 재해석과 역사적 의의 등 미학적 견해는 날로 발전, 조선시대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세계 도자사에도 그 유래가 없는 걸작으로 격상되었다. 이를 뒷받침하듯 나라에서도 이를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했고 그 가격 또한 최소한 30억 원대에서 60억 원까지 호가하는, 말 그대로 국보급이 되었다. 그런데 이토록 민족적 자긍심을 갖게 하는 유물이 그 관점의 차이로 한때는 등외시 당하던 시절이 있었다.   1950년대 초다. 지금은 은퇴한 대상 홍모옹(90)이 백자대호, 지금의 달항아리로 불리는 명품을 간송 전형필선생에게 권유했다는 것이다.
간송은 잘 알려진 대로 장안 제일의 갑부, 10만섬 재산가의 아들로 일제 때 천학매병(청자상감운학문매병: 국보68호)을 당시 수백석지기에 해당하는 이만원(서울 장안에 쓸 만한 기와집 10채에 해당)에 샀는가하면 현재 보물241호로 지정된 청화백자양각진사철채난국초충문병 한 점을 경매장에서 1만4천5백80원의 거액으로 낙찰하기도 했다. 당시 지방 군수월급이 70원이던 시절이다. 그가 수집한 국보급 문화재만도 훈민정음 원본을 비롯 셀 수 없을 정도다. 그의 수집품을 매년 봄 가을 두 차례씩 성북동 보화각에서 전시할 때마다 관람객이 구름처럼 모이는 것도 우리 문화재의 보고로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간송에게 백자대호를 권유했더니 별로 말씀이 없으신 분이기도 했지만 의외의 답변이 나왔다는 것이다. “부엌살림을 왜 사나?”라며 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간송은 일제 때와는 달리 해방이후 문화재를 열성으로 수집하지 않던 때였다.

여하튼 우리 문화재의 보고로 한 외국인 학자는 “간송미술관이 문화재를 공개하지 않는 한 한국고미술사를 쓸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우리 미술사의 보고로 알려진 「간송미술관」에 그 흔한(?) 달항아리 한 점이 없다는 것이다. 간송은 우리 유물 중에서도 왕실이나 선비들이 향유했던 고급문화유물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이 무렵 원로 홍모옹의 점포에 단골로 다니는 분 중에는 도상봉(1902-1977)과 김환기(1913-1974)씨가 있었다. 이 두 화가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백자대호들이었다. 홍옹의 회고에 의하면 기억에 남는 두 분들은 작품의 정물 소재로 사용하기위해 백자 항아리들을 골랐는데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못해 완전한 것이나 상품성이 좋은 것은 선택하지 못하고 금이 갔거나 비틀어진 것, 더러는 일그러진 것들을 사다가 꽃을 꽂아 정물화를 그린 것으로 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언밸런스한 멋을 더 좋아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김환기화백은 1951년 제작한 작품에서 바닷가 풍경을 배경으로 아이들과 여인들이 항아리를 들거나 머리에 이고 거니는 장면을 그린 뒤 「항아리와 여인」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항아리는 실용품에 해당하는 것이어서 일상 풍경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한 아이는 예부터 매화를 꽂아 즐겼다는 매병을 안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이는 도자기의 형태를 통해 조형미를 강조한 것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1952년에는 문제의 제목 「달과 항아리」를 제작한다. 직사각 세로 그림에 달과 항아리만의 선위주로 작품을 구성 했다. 반추상의 작품이다. 색은 자연을 따르지 않고 개성있는 자신만의 색상을 창출했다. 상단에 달, 중앙의 항아리에는 그 속에 둥근 달을 다시 주홍색 바탕의원으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 하단에 다시 항아리가 있으나 그 표현은 잘린 상단만 있다.


영국 대영박물관 소장의 <달항아리>
 
일본 오사카 시립 동양도자기미술관 소장의 <달항아리>

이후 「달과 항아리」는 1955년에 제작했다. 이 작품은 길쭉한 전시대에 달 같은 둥근 항아리가 올려진 모습이다. 이 항아리는 전시대에 올려져 있다기 보다는 좁고 긴 끈으로 연결된 느낌이다. 항아리가 달 같고 달이 항아리 같은 느낌이다. 이후 일련의 작품들은 다른 소재와 결합되면서 달인 듯 항아리인 듯 둥근 모습이 반추상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이 무렵 도상봉화백 역시 1954년 작 「정물」에 백자대호가 등장한다.
이 정물화 속의 항아리는 요즘 국보로 지정된 달항아리의 형태를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실물 그대로를 실사한 것으로 보인다. 김환기의 항아리처럼 둥그렇지가 않고 조금은 길쭉한 형태다. 조선 18세기 흔히들 금사리요에서 생산된 모습이다. 밑굽이 좁고 위로 올라가는 선이 둥글지가 않고 사선으로 올라가는 듯 하다가 즉, 달이 떠오르는 듯 올라가다가 어깨선에서부터 둥글어지면서 입부분에 마무리 지어지는 것이다. 이 같은 실제의 달항아리는 모두가 사발모양으로 두 개를 만들어 상하로 붙여 만들었다. 이때 상하 두 개를 붙이기 위해서는 직경이 같도록 접지면을 오므리다 보면 항아리는 중간이 약간 직선의 분위기를 갖는다. 그래서 항아리 전체의 원은 달처럼 둥글지가 않고, 밑 부분은 굽이 입의 지름보다 좁아 불안하게 느껴지며, 위로 올라가다가는 접면부위가 직선인가하면 위로 올라가다가 둥근 형태로 마무리 지어지는 것이다. 완전한 원형이 아니라 꿈틀거리는 원형인 것이다. 밝은 보름달을 보면 달의 외곽선이 보이질 않는다. 구름 속에 흘러가는 달 역시 똥그란 원형이 아니가 동적인 인상 때문에 꿈틀거리는 원형이다. 우리의 백자대호 역시 그런 달의 이미지대로 정확한 원형이 아니어서 달항아리로 불리워졌는지도 모른다. 현대 도예가들이 전기 물레로 한 번에 대형 항아리를 동그랗게 만드는 것은 손쉬운 작업이다. 그런데 옛날 발물레로 크게 도자기를 성형할 수가 없어서 두 쪽으로 만들어 붙이게 되면 수축 방향이 서로 달라 잘 붙지 않는 어려움이 있다.
이런 모든 기술적인 난관을 거치고 탄생한 달항아리는 도예가들만이 아는 감동을 주게 마련이다. 그 좋은 예가 20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Howell Leach, 1887-1979)가 1935년 한국에서 달항아리 하나를 구입해 가면서 “나는 행복을 안고 갑니다”라며 좋아 했다는 것이다. 이 항아리가 그의 사후 유족으로 나와 현재 영국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이다. 2005년 백자 달항아리 특별전에 출품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특별전 9개의 항아리 중 또 하나의 화제를 모은 것은 현재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높이 45cm의 백자 달항아리다.
 
김환기 <달항아리> 54 x 25.5cm 1952


도상봉 <항아리> 46 x 53cm


김환기 <항아리와 매화가지> 99.9 x 65.1cm

원래 일본 도다이지 관음원에 소장된 이 백자대호는 주지스님이 그 앞에서 명상을 즐기던 것으로 대낮에 도둑이 들어 훔쳐 도망쳤다. 도둑은 경비원들에게 추격되어 항아리를 가지고 도망칠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도망가 버렸다. 부서진 조각이 300여 쪽에 이르렀다. 경찰의 조사가 끝나고 이 파편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되었다. 이후 2년여 걸쳐 복원되어 재탄생되었다. 미술관에서는 복원 완성을 위해 이 항아리의 특별전을 열었고 2000년에는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에서 전시되어 달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전 세계에 알렸다. 일본인의 복원기술 또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조선 18세기 백자대호가 김환기ㆍ도상봉화백 등의 작품 소재로 등장하면서 ‘달항아리’라는 애칭으로 우리들에게 불려졌다.

 


도상봉 <항아리> 53 x 45.3cm

 

그리고 그 이름으로 해서 더욱 빛을 발하게 됐지만 그 항아리의 본질은 태어날 때부터 현대미학적 요소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물은 변함이 없는데 그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생각에 따라 부엌살림에서 달과 같은 백색, 무아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선의 대상으로 까지 변하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김환기 <달과 항아리> 162.2 x 97cm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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